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이즈미 준이치로 (문단 편집) === 총리가 되다 === 고이즈미는 [[1990년]] [[가토 고이치]], [[야마사키 타쿠]]와 함께 YKK 연합을 결성하고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. YKK는 세사람의 영문이니셜로 이들은 다케시타파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. YKK 연합은 고이즈미보다는 가토가 리더의 역할을 했기에, 사실상 이 연합의 막내격이었다. [[1995년]] 9월에는 우정사업 민영화를 내걸고 [[하시모토 류타로]][* 하시모토와 고이즈미는 [[게이오기주쿠대학]] 선후배이다.]와 총재 자리를 놓고 싸웠으나 대패하고, 1998년에는 [[오부치 게이조]] 전 총리와 대결[* 오부치는 고이즈미 모교의 [[소케이센|영원한 숙적]]인 [[와세다대학]] 출신이다.]하였으나 역시 패하였다. 그러나 2000년 말 '[[가토의 난]]'이 실패하면서 고이즈미가 YKK연합의 대표로 나섰으며, [[모리 요시로]]가 지지율이 10% 아래로 추락하면서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가 확실시되었던 상황이었고, 2001년 4월 24일, 자민당 총재경선에서 예상 밖의 당원 돌풍을 일으키면서 95년 패했던 자민당 최대 파벌 [[헤이에이 연구회]]의 [[하시모토 류타로]]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이로 누르고 총재도전 3수 만에 정상에 올랐다. 이후 2003년에 후지이 다카오 후보를 누르고 총재 자리를 연임했다. 그리고 2001년 10월 16일 방한했다. 한국의 인터넷에선 원래 [[노나카 히로무]]가 총리로 유력했으나 [[부라쿠민]]이어서 고이즈미가 이겼다는 식의 얘기가 퍼지기도 했는데, 사실이 아니다. 애초에 노나카 히로무는 총재 선거에 출마한 적도 없고, [[하시모토 류타로]]와 후지이 다카오를 후보로 밀었으나 두 후보 모두 개혁을 내세운 고이즈미에게 패배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